"무(無)"
나의 초등학교 시절엔 동네에 서점이 정말 많이 있었다.
사람들이 책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서점이었기 때문이다.
지금은 일반 오프라인 서점을 비롯해 온라인 서점, 당근 마켓 등 책을 구할 수 있는 통로가 많지만 그때는 서점이 유일했다.
인터넷이 없었고 핸드폰이나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말 다 했다.
그 시절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.
"왜 글이 아무것도 안 적혀있는 책은 없을까?"
하긴 글이 안 적혀 있으면 책이 아니긴 한데 서두에 멋진 말귀를 적어놓고 빈 페이지로 책을 만들어 버리면 안 될까?
그런 빈 페이지의 책을 출판한다면 이 책은 마음이 착한 사람에게만 글이 보인다고 이야기하면 될 것 같았다.
정말 그런 책이 나왔다면 당연히 나는 안 샀겠지만 "벌거숭이 임금님" 동화책을 떠올리며 내 생각은 자유로웠다.
그런데 서점에서 진짜 내가 생각하던 그 책을 맞닥뜨렸었다.
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책 제목이 기억난다.
책표지엔 정말 큼지막하게 딱 1글자(한글 1자, 한문 1자)가 적혀있었다.
"무(無)"
그때 초등학생이었지만 다행히 '무' 한자 뜻을 알고 있었다.
"없다고? 뭐가 없는 거지" 하고 책을 열어봤는데 진짜 아무 글자가 없었다.
수 십 페이지가 넘는 빈 페이지였다.
종이의 재질은 조금은 누른끼가 있는 모조지였다.
"내가 생각한 책이 정말 있었네!"
한편으로는 놀라웠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왜 진짜 그 책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.
그때 책의 서두를 읽어봤다면 저자의 의도를 파악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게 아쉽다.
우리는 항상 누군가가 쓴 글을 보고 산다.
그리고 모든 책은 주제가 정해져 있다.
내가 원하는 정해진 주제의 책을 사서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한다.
그런데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책을 쓴 저자의 의도는, 그리고 그런 책을 출판해 준 출판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?
"지식은 책에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혜나 진리는 책에 쓸 수 없고 우리 마음속, 머릿속에 있다" 라는 이유로 빈 페이지로 둔 것이었을까?
매일 변화하는 감정을 정리하려 그 책을 열고 빈 페이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?
너무 슬프거나 너무 즐거울 때도 어떻게 보면 순간일 뿐 언젠가는 사라지고 없어질 감정이라는 걸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?
아니면 인생이란 것이 무(無)에서 유(有)로 왔다가 다시 무(無)로 돌아간다는 순리를 설명하고 싶었던 걸까?
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 생각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 제목과 책 내용(빈 페이지)이었다.
그러고보니 저자와 출판사는 책을 팔지는 못해도,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진짜 진리는 책 자체가 아니라,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.
만약 정말 그런 의도였다면 그 책은 한 권이 아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몇백 권 이상의 책으로써의 가치를 가질 것이다.
인생이 너무 힘들거나, 반대로 너무 즐거울 때도 그 책 제목을 떠올려야겠다.
상심할 필요 없고 너무 들떠있을 필요도 없다.
"무(無)"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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